대하 - 08

한가한 게 지나치면 권태로 된다. 호랑이라도 잡을 한포락에, 제가맡은 일이라고 특히 지정된 것이 없고, 긴긴 해를 집안 구석에서 빙빙 돌기란 하루 이틀은 몰라도, 그것이 몇 달이고 몇 해고 기약 없이 계속되면, 어쩔 수 없는 권태로 되어 젊은 육체를 늘어지게 휘감고 돈다.
형준이는 스물이 넘어 두 해로 접어드는 한창인 시절에 별로 할 것이 없다.
이따금씩 말을 타고 농막을 돌아보는 것과, 추수 때에 타작하는 데를 좇아서 따라 도는 것과, 평양 영감을 동무해서 가끔 고기사냥을 가는 것과, 그리고 마음이 내키면 겨울에 매사냥에 한몫 끼여 싸다니는 것, 이것이 그의 일 년 동안에 하는 전부의 일이다.
그러나 추수 때에 농막을 찾아 타곡한 것을 나누러 다닌다든지 장마 뒤에 밭을 돌아보는 것 같은 것도, 결코 그의 혼자서 맡은 전임이 아니었다. 이것을 하기 위하여 따로 사람을 두었다. 그러므로 일이 바빠서 손이 모자랄 때, 그는 마음이 내키면 말을 타고 소풍삼아 나가 보는 것이다.
이런 것조차 제가 책임진 일이 아니고 보니, 그 밖의 집안 가도에 관계되는 일은 하나도 그의 간섭 밖에 놓이지 않은 것이 없다.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일, 장난삼아 심심풀이로 하는 일, 이것은 젊은 사람의 정력을 이끌어들일 만한 힘을 갖고 있진 못하다.
세간살이의 한 부분을 맡아서 해나간다든가, 땅이면 땅, 돈이면 돈, 장사면 장사, 무엇이든가 제가 어느 정도까지 자유로 조처할 수 있는 어떠한 업이 있어야 할 것인데, 박참봉은 아직 장남인 형준이에게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자기의 그 시절을 회상하다 보면 형준이의 연세가 부족하다든가 그렇진 않을 것인데, 어딘가 아직도 앳되게 보이는 게 호락호락하고 위태위태하고, 또 한편 아들에게 일을 맡기기엔 박참봉의 연세가 너무 젊다. 지금 갓마흔, 아무리 많은 일에 몸을 잠가도 남아 돌아가는 정력과 궁리를, 유치한 아들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박참봉이 스물 안짝에 가도 범절을 맡아서 치러 나가고, 다시 그만한 어린 낫세로 기울어진 살림을 부둥켜 세운 데는, 시대나, 또는 박참봉의 성격이나, 그런 것이 적지 않게 관계되었겠지만, 그의 부친 되는 박순일이가 일찍부터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사시장철 집을 비우고 재산의 탕진에만 정열을 써버린 탓에, 소시에 벌써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스스로 단련을 치른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준이는 본시 성격이 박참봉 같지 않은데다, 환경과 경우가 그의 아버지와는 판이하다. 그는 아버지가 하다가 남은 사소한 일에, 심심풀이로 손을 댄다든가 하는 외에 별 일거리가 없는데, 그것조차 밑으로 비복, 절게, 막서리가 수둑하니 있어서, 그의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어진다.
형준이가 만약 장남이 아니고, 집안을 계승할 책임이 있는 종자(宗子)가 아니라면, 농막을 한부분 갈라 받아 세간을 낸다든가, 무슨 딴 일을 시켜서 살림을 새로이 배설해 줄 도리도 있을 것인데, 처지가 그렇게 된 터라, 그는 어차피 이 집을 떠날 수는 없는 팔자였다.
그런데다가 첫째 형준이는 돈을 자유로 쓰지 못한다. 제 몫이라고 도맡아서 들이고 내는 것이 없으니, 한푼 돈이라도 소용될 대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타서 써야만 한다. 먹고 입는 것이 하나도 부족됨이 없고, 또 저 혼자 독립된 것이 아닌데다가, 밖으로부터 사들여야 할 것이 거의 하나도 없는 탓으로 별반 용돈이라고 소용이 없다. 한편 술이나 딴 장난에 취미를 갖지 못한 때문에, 여태까지 돈이라고는 필요치도 않던 것이다.
그가 유족한 집 장남으로 태어나서 상당한 연세에 이르도록, 주색이나 잡기에 빠지지 않은 데는 아직 그의 아내에 대한 애정이 권태기에 들어가지 않은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겠지만, 함께 어울릴 동무로서 맞차운 이가 없었다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아버지가 나이 아직 사십 줄에 있는만큼 형준이보다 조금 나이 지긋한 사람은 모두 아버지의 친구요, 그보다 조금 처져 붙으면 곧 형선이와 형걸이의 친구들이다. 그래 그와 동년갑에 맞차운 동무가 있어서, 같이 어울려 다녀야 할 것인데, 다행히 그런 작자가 아직까지 없었다. 그는 밤이 아무리 무료하고 적적하여도, 제 집 밖으로 나갈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무 색시를 얻은 지도 사오 년이 지난 뒤라, 결혼 당시의 단꿈도 식어 버리고 벌써 아들 하나 딸 하나의 어미가 된 그의 아내는, 사나이의 변함없는 정열의 대상이나 매력이나가 되기에는, 이모저모로 부족한 느낌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땐땐하던 근육이 탄력이 없어지고, 젖은 본시부터 밑으로 처져 붙어 커다란 박참외 같은 것이 아이를 둘씩 기르는 동안에 훨씬 더 모양 없이 늘어지고, 밑배와 한가지로 포동포동하고 매끈하던 젖가죽에는 살이 터서 번득번득하는 줄기가 지고 얼룩이 졌다. 눈썹과 머리카락이 유난히 엷어지고, 이들도 볼편에 살이 빠져서 좀 나온 듯하다. 게다가 맏며느리 노릇 하랴, 아이들에게 시달리랴 하여, 밤이면 실꾸리도 몇 개 못 걸고 곯아떨어져서, 남편의 애무도 때로는 시끄러울 때가 있는지, 별로 만족해하는 기색이 없다. 형준이는 이 봄을 맞이하면서 확실히 자기의 심경이 변하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마음이 지향없이 달뜨는 것 같고, 공연히 싱숭생숭한 것 같으면서 어떤 때는 가슴속에 잔인스럽고 포악한 발동이 치밀어 오르는 것처럼 막연하니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의 심경이 무엇을 요구함인지를 확실히 종잡지 못하는 그는, 얼마 전에 생각다 못해서 나카니시 상점과 칠성이네 세매끼장사와 용구네 과자방을 예로 들어서 자기도 이러한 여러 저자를 도합한 것만한 커다란 잡화상을 벌여 보겠다고 아버지에게 상론하였으나, 아직 이르다고 승낙을 받지 못했다. 장사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삼는 것이 이르다는 것인지 형준이가 그러한 것에 손을 대는 것이 이르다는 것인지, 형준이는 한참 동안 아버지의 말뜻을 몰라서 쭈그리고 앉았는데,
"장사라는 게 우리의 못 할 업이라구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하나 건넛집 칠성이나 나카니시와 어울려서 가게를 벌이기에는 이모저모로 시기가 안즉 일러. 또 칠성이에게 돈 융통해 준 게 있으니 그 애 하는 걸 당분간 보아 가는 것이 위선 상책이야."
박참봉은 아직도 모든 영업이나 장사를 대금(貸金)으로 얽어 두는 것을 가장 현명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돈변을 놓은 이상엔, 밭이거나 집이거나 장사거나 언제든지 필요한 때는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칠성이의 장사는 내 장사나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장차 잡화까지를 널리 벌여놓게 될는지도 모르나, 무섭게 불어 나가는 돈 이자 앞에 그의 상점이 얼마나 견뎌 나갈는지는 볼 만한 거라고 그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자를 실컷 뽑아먹다가 낚아챌 수도 있는 것이요, 그대로 두면 이는 이대로 먹고 그의 은인까지 되는 것이다. 남에게 머리를 굽히며 손수 나가 장사를 벌일 필요가 없다고, 그가 굳이 생각하는 것도 까닭이 없음은 아니었다.
형준이는 아버지가 저녁을 먹고 두뭇골 집으로 가버린 뒤에 사랑에 불을 켜고 잠시 아버지가 앉았던 보료 위에 우두커니 앉아 보았다. 문갑과 벽장에는 쇠를 채워 버렸다. 박참봉은 문서는 대개로 큰집 사랑 벽장과 문갑 속에 넣어 두고, 현금은 두뭇골 집 사랑에 붙은 골방 깊숙이 간직해 둔다. 그러나 그가 방을 나가 버릴 때엔 어느 곳에든가 굳이 자물쇠를 잠가 두는 것이었다.
한참 그럭하고 앉아 있는데 마당에서 바깥 큰대문 잠그는 소리가 들린다.
"거 누구."
하고 위엄 있게 불러 보니,
"저올세다."
쌍네의 나직한 목소리가 대답한다.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난 뒤에 밖에서는 잠시 아무 기척이 없다. 무슨 호령이나 분부나가 들릴까 하여 잠깐을 그럭하고 서서, 쇠고리에 손을 얹은 채 기다려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서는 다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등잔불이 창문에 붉을 뿐이다.
동안이 퍽 떠서야 댓돌을 내려서는 좀 높직한 쿵 하는 소리와, 마당을 지나가는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발소리는 점점 멀어 가더니 이윽고 없어져 버린다. 서각 위를 돌아 물역 쪽으로 쌍네는 제 방에 돌아가 버린 것이다.
형준이는 잠시 동안을 더 그럭하고 보료 위에 앉아 있다. 그는 막연히 지금 쌍네가 대문을 잠근 것으로 연줄이 닿아,
'인젠 오눌 밤중으로 내 집에 둘어올 사람은 없겠구나.'
하고 생각해 본다.
'두칠이는 돈을 받으러 회창으로 보행을 갔다.'
그는 다시 두칠이가 보행 떠나던 것을 회상한다. 바로 어제 저녁 이맘때, 박참봉은 저녁상을 물린 뒤 두칠이를 불러다 앉히고, 회창으로 보행갈 것을 말한 뒤에,
"보행전(步行錢)으론 스무 냥을 적었다. 길두 사납구 나귀도 놀구 있으니 그놈을 타구 일쯔감치 떠나거라. 꼭 이번엔 받어 들고야 오랬다구서, 당나귀를 들이매구 너는 아랫목에 가 자빠져 누웠거라. 그런 괘씸한 놈이 안 있나. 사람을 속여두 분수가 있지. 요즘 사푼 변이 어디 있다구, 생색을 해준 것두 모르굴랑."
이렇게 말하면서도 기둥뿌리를 뽑아서래도 이번엔 꼭 돈을 받아 갖고 오라고 당부한다. 이튿날, 즉 오늘 아침 동이 훤히 터서 쌍네가 나귀 멩이를 들고 나더니 해가 불쑥 치밀자 두칠이는 바깥 큰대문으로 나귀를 내세우고 회창을 향하여 떠나갔다.
'이틀, 어쩌면 삼사 일 걸릴는지두 모르겠다.'
형준이는 훌쩍 일어나서 문을 모두 걸쇠로 돌려 닫고 불을 껐다. 평양 영감 방으로 가보니 그는 아침 일찍이 자리를 치러 나가 보겠다고 중얼거리며 그물을 꿰매고 있었다.
"피양 영감 장기나 한번 둡세."
하니 허리가 좀 꼬부라지고 머리에는 거의 허옇게 된 상투를 고치 송이만큼 댕글하니 세워 놓은 영감은, 그물을 놓고 뒤꼍에서 장기판과 쪽이 든 구럭을 내놓는다.
그러나 장기를 절반도 안 두어서 곧 형준이는 싫증이 났다. 본시 얼마 두고 싶어서 시작한 장기도 아니다. 멍하니 빈 사랑에 혼자 달랑하니 앉았기도 멋쩍고, 그렇다고 어디 바람을 쐬러 나갈 만한 곳도 없고, 제 방으로 돌아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자니 마음이 생숭해서 발길이 내치지를 않는다. 그런데다가 그는 지금 오랫동안 생각만 해 오던 것이 오늘 밤을 기약하여 벌어질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각이 올 때까지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허비해야만 한다. 평양 영감을 도와 그물코를 꿰맬까 했다가, 장기판을 보고서 그래도 두어볼까 하는 한갓 되지 않은 생각으로 장기쪽을 손에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평양 영감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 밤 안으로 그물을 고쳐 놓고 일찌감치 자릿속에 들었다가, 아침 새벽에 강으로 가려고 될수록 재빠르게 손을 놀리던 때에 서방님이 들어와서 한참 물끄러미 섰더니 장기를 두자고 하는 것이다. 처음엔 이 양반이 남 바빠서 이러는데 한가한 작자들이 나무 그늘에서 팔자 푸념을 하노라고 두는 장기는 어이자고―--- 이렇게 좀 내심에 끌리지 않는 걸 할 수 없이 시작은 했었으나, 오십이 넘어 육십이 가깝도록 취미라곤 장기 두는 것밖에 없는 그로서는 정작 두어 가니 바짝 입맛이 당기던 것이다. 그래 어둑시근한 등잔불 밑에서 장기판을 보살피느라구 눈을 잔뜩 찌푸리고 말 가는 길, 차 가는 줄, 뛰어넘는 포, 엇비듬히 덮치는 상, 졸망구니 귀사와 졸병들을 빈틈없이 쫓아가고 있는데, 서방님이란 이가 어이 된 일인지 뻔한 것을 덤뻑덤뻑 먹히는 채 내버려두는 것이다.
찻길에다 말을 내세운다든가, 불과 한 수만 앞일을 생각하면 빤한 곳에도 정신없이 중한 포를 염나들게 마련이든가, 도무지 장기판에 정신이 있는 성싶지가 않다.
"장운이."
하면, 뒷일을 생각지도 않고 그대로,
"멍훈."
하고 아무렇게나 막고 마는 것이다. 그래 너무 패가 기울어지는 것도 외려 재미가 없어,
"아니 서방님 찻길이 아니웨까."
하고 말을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에히 손에 잡히질 않으니 그만둡세."
하고 아직도 말쪽이 많이 남아 있는 걸 장기쪽으로 헝클어 버리고, 번뜻이 양손을 뒤로 의지하여 노전 위에 기대 버리고 만다.
"왜 자미가 없쉥까."
하고 평양 영감은 약간 웃어 볼 뿐이다. 하나하나 장기쪽을 구럭에 넣어 제자리에 걸어 놓고 장기판을 뒷바람에 세우더니 다시 그물틀을 끌어다 댓바늘만 놀리고 있다. 그는 서방님이 번뜻이 누워서,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갈빗대처럼 서까래가 까맣게 보이는 흙매질한 천장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마음에 생각지도 않는지 통히 그쪽으론 눈도 팔지 않으면서 그리고 조금 전에 하던 일을 중단하고 서방님과 장기를 두던 것도 솔챙히 잊어버린 듯이, 꿰어진 그물코만 고르고 앉아 있다. 머리는 희나 얼굴은 몇 해째 해에 그을려서 까마룩하니 탔다. 붉은 낡은 궤를 하나 물매질한 뒷바람벽 앞에 댕그러니 놓고, 그 위에 영감이 덮는 얇은 요와 이불이 땀에 전 목침과 베개와 함께 올라앉았다. 네대틀 그물이 걸려 있고 여름에 쓰는 삿갓이 하나 걸려 있을 뿐 그러한 가운데 그물틀을 무릎 앞에 놓고 평양 영감이 그림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공기와 분위기 속에 형준이는 오래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영감내가 홀아비내와 섞여서 나고, 거기에 물비린내와 생선 냄새까지 풍긴다. 초조한 젊은 마음이 이러한 풍경 속에 누워 있으면 속만 더 질식할 듯이 답답하다.
형준이는 평양 영감 방에서 나와 제 방으로 갔다. 제 방에 들어오기 전에 그는 맞은 방에서 형선이와 제수가 불을 켜놓은 채, 형선이는 책을 읽고 제수는 버선코라도 꿰매는지, 혹은 둘이 다 무슨 책을 읽고 누웠는지 이따금씩 도란도란하는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려 오는 것을 잠깐 귀를 기울여 듣고 섰다가, 이윽고 큰 안방을 바라본다. 형식이와 보패는 잠이 든 모양이나 불이 아직 발갛게 켜져 있다. 물레질을 붕붕 하고 있는 것은 늙은 종이기 분명한데 어머니도 나직이 기침 소리가 나는 걸 보면 무슨 톱명주를 뽑고 있든가 바느질에 손을 대고 있든가 하는 모양이다.
―---아직 밤이 이르다.
그는 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랫목에 딸자식을 끼고 누워서 아내는 불을 켜놓은 채 잠이 든 모양이다. 그 다음 자리에서 성기란 놈도 자고 있는데 형준이의 자리는 윗목에 깔아 놓아 두었다.
형준이가 들어오는 바람에 아내는 자던 눈을 뜨고 눈이 시어서 잠시 방 가운데 선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그대로 눈시울을 두어번 비비고 다시 아이께로 몸을 돌린다. 물렸던 젖을 별안간에 뽑는 통에 아이가 끙끙거린 때문이다. 무어라고 입 안으로 둥얼둥얼 아이를 달래다가 저도 마저 잠에 취해 버린다.
형준이는 제자리에 가 앉아서 아내의 자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럭하고 앉았기가 무료해서 그는 담배를 붙여 물었다. 몇 모금도 못 빨았는데, 가운데서 자던 성기가 담뱃내에 기침을 콜럭콜럭 깃는다. 그래서 그는 다시 담배를 끄고 방싯하니 문을 열어 연기를 뽑았다.
그는 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워 본다. 건넌방에서 나던 물레질 소리도 그쳤다. 형선이 방에서 들려 오던 도란도란하던 말소리도 없어졌다. 아이들의 숨소리에 섞여서 아내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 올 뿐.
형준이는 불을 껐다. 캄캄하다. 뜰 안도 까맣다. 방마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든가 보다. 캄캄한 속에 혼자 누워 있으면, 여태껏 흐리멍덩하니 생각되던 것이 눈앞에 벌어지기 시작한다―---두칠이 처 쌍네, 얼굴, 가슴, 궁둥이.
형준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으나, 방문은 소리 안 나게 열었다. 가만히 방문을 닫고도 그는 토방 위에서 한참을 그럭하고 서 있다가, 방 안에서 여전히 숨소리와 코고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을 알고야 이윽고 뜰 아래 내려섰다.
마루 밑에서 자던 검정개가 뿌르르 기어나오더니, 형준이 앞에서 꼬리를 설레설레 젓는다.
'끼 개' 하고 나직이 꾸짖으니 개는 형준이 앞에서 물러섰으나, 중문께로 헐럭시며 달아난다. 혹 깊이 잠이 들지 못한 이가 있어, 제 인기척에 놀라 눈에 띄지나 않을까 저어하여, 방 앞을 지날 때는 형준이 쪽에서 짐짓 나직이 기침을 한다.
그는 중대문께로 가서 소리나지 않게 빗장을 뽑고, 몸 하나가 겨우 나갈 만치 문을 열었다. 좀더 활짝 열어 젖히면 빼그득 하는 귀 째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을 알고 있는 때문이다. 개도 주인의 뜻을 받아, 살짝 문틈으로 몸을 뽑고 사랑 마당 가운데로 뛰어갔다가, 다시 형준이 옆으로 달려오면서 나직이 코를 쿵쿵거린다.
"끼 개."
"끼 개."
이렇게 꾸짖어서 개를 달래 놓은 뒤에, 그는 서각 뒤를 돌아 외양간 옆을 지나서 물역 뒷대문께로 가만가만히 발을 옮겨 놓았다.
캄캄한 가운데서도 별이 총총 박힌 하늘은 희끄무레하게 트여서, 그것이 십이봉의 웃줄웃줄한 봉우리에까지 잇닿았다. 그는 수숫대 바자에 손을 얹고 잠시 그곳에 서 있었다. 저만큼 굳이 닫은 뒷대문이 있고, 그것과 잇대어서 두칠이가 사는 막간방 부엌이 있다. 그 방 안에 지금 쌍네가 혼자 곤하니 잠이 들어 누웠을 것을 생각해 본다.
드디어 형준이는 이렇게 바자를 짚고 주저거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진다. 무슨 큰 결심을 한 듯이 용감 있게 덥벅덥벅 걸어간다. 그러나 방이 가까워 오매 다시 발소리는 낮아지고 걸음은 떠졌다.
이윽고 그는 부엌문 앞에 서 있다. 인제는 문걸쇠에 손을 대고 그놈을 낚아채고 들어가서 다시 한번 샛문을 열면은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행동이 생각대로 되질 않는다. 몇 번을 주저하고, 몇 번을 더 걸쇠에 손을 대었다 떼었다 하다가, 팔에다 힘을 넣어 잡아당겨 보았으나, 뜻밖에 안으로 문이 걸렸다.
아뿔싸. 그는 손을 떼고 잠시를 또 그럭하고 서서 마음을 진정해 본다. 벌써 그때엔 가슴이 한소끔 끓어 올랐다가, 뿌엿한 것만이 묵중하니 남고, 낯에선 피가 쭉 흘러내릴 때였다.
어째서 문을 잠갔을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언제나 이렇게 문을 안으로 잠그고 자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만일 장근 이렇게 문을 잠가 두진 않는다 해도, 두칠이도 없는 때라 휙 문을 닫고 들어가던 김에 그대로 덜컥 문걸쇠를 돌쩌귀에 얹어 논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문이 걸려 있다는 걸 괴이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두어 번 덜강덜강 흔들어 보다가,
'이, 부엌문 열어라' 하고 나직이 분부를 내리면 그만일 게다. 그러면 아무리 깊이 든 잠이라도 푸시시하니 눈을 뜨고, 잠시는 누구가 이 아닌밤중에 문을 열라고 이러는 것일까 하고 수상히 생각해 볼 것이나, 곧 덜렁거리는 소리는 부엌문이라는 걸 알 것이고, 이어서 문 열라고 분부하는 이는 상전 댁의 누구라는 거, 아니 목소리로 보아 그이가 맏서방님이라는 걸 알 것이다. 그러면 곧 고의 다리를 끼고 치마를 두르고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보스락거리느라고 바빠할 때 자기는 또 한번,
'어서 문 열어라' 하고 재우치면, 거의 넘어질 듯이 덤비면서 문을 열 것이다. 그때엔 아무 말 말고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 그의 손목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그럭하고, 또 그럭하고, 그러면은 될 것이다. 이렇게 두루두루 생각해 보고 문을 낚아채 흔들려고 하는데,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형준이는 처음 제 심장의 고동 소리에 제가 놀란 거나 아닌가 하여 주춤했으나, 그것과는 달리 제 가슴에서는 달락달락하는 맥 뛰는 소리가 여지껏 들리고 있다. 그러면? 혹시 쌍네가 잠꼬대를 하면서 중얼거린 게나 아닌가. 그래서 다시 귀를 기울여 보는데 벌써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디서 또 달려오는지, 검정개가 발뿌리에서 설레댄다. 뒷발로 개를 뿌리치면서 손을 문걸쇠에 갖다 대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사나이의 음성이 방 안으로부터 들려 온다. 뭐라는 소린지는 몰라도 짤막한 말로, 그건 똑똑히 사나이의 음성이었다. 그렇다면 그 음성이 누구의 것일까? 두칠이의 것이 아닌 건 뻔하다.
두칠이가 아니라면 이 방 안에 쌍네와 함께 캄캄한 속에 불도 안 켜고 드러누워 있는 사나이는 대체 누구일 것이냐.
잠깐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형준이는 이 방 앞에 처음 찾아올 때와 다른 목표로 그의 마음을 돌려잡아 버렸다. 그는 몇 발자국 물러섰다가, 발소리를 짐짓 크게 구르면서 뒷대문께로 돌아가서 빗장을 뽑고 강역으로 통한 토방으로 돌아섰다. 목소리를 가다듬어 쌍네에게 호령을 하려 하는데, 문은 오히려 방 안으로부터 열리고 캄캄한 속에서 젊은 사나이가 불쑥 나왔다.